나는 늘 삶에 쉬이 눈을 두지 못하였다.
시끌벅적한 회식 자리에서는 딴 생각을 하기 일쑤였고, 부장의 어쭙잖은 인생 충고질을 들을 때는 홍상수 영화가 오버랩되며 우스워 보였다.
‘당신이나 나나 아등바등 꾸역꾸역 찌질찌질하게 살아가는 불쌍한 중생들이거늘..’
혐인.
고종석씨가 염세와 혐인을 통해 절망을 견딘다고 했을 때, 나는 부랄을 탁 치며 공감했었다. 내가 친구가 별로 없는 것도, 타인의 드라마에 무관심인 것도 그 한 단어면 설명이 되는 것 같아 기뻤었다.
모두 내 기저의 혐인 때문이다.
병신이라는 생각이 들면 함께 숨쉬는 것 조차 힘들다.
그렇게 괴로움을 견디고, 또 견디고, 또 견디고,
그 거대하고 잔인한 밥벌이의 시간을 견디고,
집에 가는 차 안.
과속방지턱에 턱턱 걸리는 건 자기 연민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살아가야 한다는 당위뿐.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의 마차 따윈 없고, 프레디머큐리와 커트코베인은 죽은 지 오래고, 돈 자랑하는 힙찔이들만이 리스펙 받는 세상이라도 나는 살아가야 했다. 온갖 통념과 조직 논리에 가뭇없이 ‘늬예늬예 그렇습죠.’ 머리를 조아렸다.
경험해보지 못했던 꼰대들의 무차별 공격에 발라당 누워 배를 드러내 보였다.
혐인과 사회화의 간극에서 나는 갈 길을 잃고 괴로워하며 천천히 자살하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벗어나고 싶었다. 사무실 책상 위에 똥을 푸지게 싸고 손흥민처럼 찰칵 세리머니 하는 상상을 하며 이 모든 인간들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다.
‘타인을 견디는 것과 외로움을 견디는 것 중 어떤 것이 더 어려운가?’라는 질문은 나에게는 너무도 쉬운 문제였다.
그리하여
나는 우선 여기에 짧은 글을 남겨둔다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기형도 – 질투는 나의 힘 中 –
혐인은 나의 힘.
아무와도 어울리지 않을 때
비로소, 가장 맑다.